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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벼랑 끝 시간 여행

by 따뜻한 소식 정기자 2024. 4. 10.

따뜻한 소식으로 세상을 밝히는 정기자, 다섯번째 이야기

 

정진철

 

어느 날, 회사에서 결혼 25주년 특별 휴가를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도를 계산해 보니 내가 올해 결혼 25주년을 맞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휴가 신청을 하고, 25년 전 결혼 때를 회상해 보았다.

1997년 8월 30일, 무더위 속에서 결혼을 한다고 나는 땀을 많이 흘렸다. 그래도 좋은 것은 아내가 생긴다는 생각에 마냥 즐거워했다.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로 갔다. 처음 타는 비행기, 첫 제주여행, 첫 경험… 처음인 것들이 많아 완전히 나는 새로운 세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어느 듯,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25년 동안 뭐가 그리 바빴는지 제주도도 다시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제주도 여행을 결심했다. 아내와 의논해서 날짜를 8월 30일을 포함한 날로 정하고, 한 달 전부터 여행 준비를 했다. 비행기 예매를 하니 마음은 벌써 제주도로 향해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제주도 여행이 시작됐다. 내가 탄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대기하다가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몇 분 동안 자동차를 탄 것처럼 덜컹거리더니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힘차게 하늘로 날았다. 하늘에서 본 세상은 장난감 같은 자동차와 집과 도로… 저곳에서 왜 그리도 아등바등 살았는지 모른다.

25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에서 아내와 함께 제주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다시금 신혼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결혼 25년을 되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을 보냈다. 나의 인생길 또한 새로움을 향해 가는 첫걸음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내 인생 벼랑 끝 시간 여행’을 소개하려 한다. 삶을 사는 하루하루가 여행과도 같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어제와 똑같이 생활해 본 적은 없다. 인생길에서 누구나 한 번쯤 어려움을 만난다. 그 어려움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결혼 후 2남 2녀의 자녀를 키우고 있을 때였다. 아이가 많다 보니 아이들이 자라면서 생활비도 점점 늘어났고, 외벌이로 여섯 식구 먹고사는 것이 만만치가 않았다.

미래를 생각하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35세의 나이에 시작한 사업은 UPS(무정전전원장치)와 AVR(자동전압조정기) 관련 사업이었다. 그러나 용감했지만 준비 없는 시작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내 마음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예전의 삶을 그리워해도 돌아갈 수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농사짓는 부모님을 도와 고향에서 몇 달 동안 지내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께 죄송스러웠다. 금의환향하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건넌방에 가서 혼자 누워 있으니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아들이 울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얘기했다. “애들을 생각해라! 애들이 얼마나 귀엽냐?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라!” 내 마음을 다 알고 얘기하는 어머니의 말에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시절을 얘기했다.

 

어머니는 시집살이하면서 셋째 딸을 낳고 삶의 한계를 만났다고 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갓 태어난 딸이었다. ‘저게 나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나? 저게 엄마 없이 어찌 살아가나?’ 그 당시 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이 때문에 마음을 바꿨다. 어머니가 나에게 “애들을 생각하라."라고 했던 말이 이해되었다. 만약 그때 어머니의 생각대로 행동했다면 넷째 누나와 나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어머니의 마음을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시절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구에게도 말도 못 했을 텐데…’ 지금껏 살아 주신 어머니가 고마웠다.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조용히 안방으로 건너가서 TV를 보고 있는 아버지께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사시면서 힘든 적이 있었는지요? 농사 지으며 자식들 뒷바라지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무뚝뚝한 아버지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 주셨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국의 해병대가 창설되었는데, 그 당시 해병대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도 해병대를 입대했는데, 막사도 없던 시절 목수 모집을 했지만 고생할 것 같아 지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대를 한 후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 사업으로 마을마다 지붕개량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목수 일도 하셨다. 지붕개량 일을 하면서 집을 짓는 일까지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도 한계를 만난 적이 있었다.

 

외가 집을 지을 때, 양식이 부족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황에서 너무나 많은 일을 하다 보니 탈진되어 일주일 동안 드러눕게 되었다. 이때가 아버지 인생의 벼랑 끝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 후 몸이 회복되면서 간신히 공사를 마무리했는데, 동네에서는 ‘집을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나면서 인증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목수 일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아버지 몸값이 오르게 되었다. 한 해는 목수 일로 모내기 시기를 놓칠 뻔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는 목수 일만 하라고 우리집 모내기를 대신해 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삶 속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었고, 내 인생 벼랑 끝에서 어머니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을 만나게 되었다.

 

나의 사업은 3년 만에 폐업하면서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사업 실패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된 두 가지, 첫 번째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 ‘혼자는 안 된다.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사원으로 있을 때는 큰소리치는 ‘사장님의 위치’가 좋아 보였고, 돈 많이 챙기는 사장님이 부럽게 느껴졌는데, 막상 ‘대표’라는 위치에 오르니까 다른 세계가 보이게 되었던 것이었다. 

‘대표’라는 위치는 자기 가정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고, 밤낮으로 돈 걱정하며 돈 구하려고 뛰어다녀야 하기에 머슴같이 일해야 하는 ‘대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았구나!’ 좁은 세계에 살았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새로운 직장을 찾아 당진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살아오면서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두렵고 외로울 때가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뛰어내려야 할지, 하늘로 날아가야 할지 기로에 서게 된다. 뉴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 기로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본다. 하지만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벼랑 끝 시간 여행’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것과 같다.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날기 위해 달릴 때는 심하게 덜컹거리지만, 하늘을 나는 순간부터는 덜컹거림은 없어지고 자유롭게 된다. 하늘에서 본 땅은 자동차도 집도 작아 보이듯, 나에게 찾아온 어려움도 작아 보이게 된다. 또한 마음으로 하는 여행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가 있다.

내 인생 ‘벼랑 끝 시간 여행’은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파도타기처럼 즐길 수 있게 되었다.